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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강세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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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장호 댓글 0건 조회 37회 작성일 25-06-0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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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대전에서 말하기를 라는 말의 뜻은 (살피다)이다

은 (지극히하다)이다.사람이 할일을 지극히 한 연후에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禮記 祭義에서 말하기를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재계하는 날에는 거처를 생각하고 

웃음과 말소리를 생각하고 뜻을 생각하고 즐거워 하는 것을 생각하고 즐기는 것을 생각한다

재계한지 3일이 되는 날에 비로서 재계를 샐행하는 것을 본다

제사는 자주 지내지 않는다자주 지내면 번거롭고 번거로우면 공경하지 않는다.

제사는 소홀히 하지 않는다

소홀히 하면 게으르고 게으르면 잊게된다이런 까닭에 가을에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이슬을 밟을때 반드시 슬픈 마음이 생긴다봄에 비가 흠뻑내리면 군자가 

비를 밟을때 반드시 근심하는 마음이 있어보는 듯이 한다고 하였다.

나라邱 濬 은 대학연의보에서 일반적으로 제사음식은 집안의 빈부에 알맞게 해야한다.

음식이 풍성함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귀한 것은 정결함에 있다

정성을 지극히 다 바칠 뿐이다.”라고 하였다朱子가 말하길 

제사는 집안이 잘사느냐 못 사느냐에 따르기는 하지만

국 한 그릇과 밥 한 그릇 에도 모두 정성과 공경을 쏟아야 한다 나의 정신이 곧 조상의 정신이요 

이것은 곧 하나의 뿌리와 싹이다

나무가 시들드라도 주위의 새로운 뿌리가 곧 이어 붙어서 바른 기운이 온다

어찌 샘솟는 생명의 기운이 감응해서 오는 이치가 없겠는가엄숙하고 경건히 정신을 

하나로 하면 조상신이 옴을 볼수 있다그렇지 않다면 단지 헛되게 음식을 차리는 것뿐이다

그릇이 많으면 씻어도 정결하지 못하고 음식이 많으면 도마가 반드시 습기찬다

성대하게 음식을 차려서 더러워지는 것 보다는 정결히 하고 간편함을 취함이 낮다.

 신령이 음식을 먹음은 단지 음식 기운이 올라가는 짧은 시간이니 많은 음식에 있음이 아니다.”고 

하였다

주자 행장에서 朱子께서는 제사를 지낼 때 일이 작고 큼을 따질 것도 없이 반드시 정성과 공경을

 다 하였다조금이라도 바로되지 않으면 하루 내내 즐겁지가 못하였다.

 제사를 지내고 법도에 어김이 없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기뻐하였다고 하였다.

 

신축년 (1781)5월 豹翁이 무한 경루에서 쓰다.


강세황 [姜世晃, 1712~1791]

본관 진주(晋州). 자 광지(光之). 호 첨재(添齋표옹(豹翁)·노죽(路竹산향재(山響齋표암(豹菴).

 시호 헌정(憲靖).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8세 때 시를 짓고, 13~14세 때는 글씨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소년기에 쓴 글씨조차도 병풍을 만드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사랑과 교육을 받았으며매형이었던 임정(任珽)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처남 유경종 외에도 허필(許佖) ·이수봉(李壽鳳등과 절친하게 지냈으며이익·강희언 등과도 교유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였던 김홍도·신위 등도 그의 제자들이다벼슬에 뜻이 없어 젊은 시절에는 주로 작품활동에만 전념하였다.

 

32세 때 가난 때문에 안산(安山)으로 이주한 뒤에도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처음 벼슬을 한 것은 61세로영조의 배려에 힘입어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다이후 64세 때 기구과(耆耉科), 66세 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영릉참봉·사포별제(司圃別提병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72세 때 북경사행(北京使行),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기행문과 실경사생 등을 남겼다··화의 삼절로 불렀으며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였다그 자신은 그림제작과 화평(畵評)활동을 주로 하였는데이를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밖에도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평생 동안 추구한 그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도 속기(俗氣)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산수·화훼가 그림의 주소재였으며만년에는 묵죽으로 이름을 날렸다. (Naver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