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江 李敬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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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장호 댓글 0건 조회 42회 작성일 25-11-20 10:12본문
이경여(李敬輿, 1585년 ~ 1657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봉암(鳳巖),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세종의 7대손이다.
1601년, 사마시를 거쳐 1609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11년, 검열이 되었지만 광해군의 폭정을 보고 낙향하였다. 1623년, 수찬으로 다시 조정에 나아가고 1624년, 이괄의 난때 왕을 공주에 호종하고 이어 이원익의 종사관이 되었다. 1628년(인조 6) 유효립에 난 진압을 도운 공로로 영사원종공신 1등(寧社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어 부제학, 청주목사, 좌승지,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병자호란 이후 1637년, 경상도관찰사, 이조참판, 대사성 등을 겸임하고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고 이어 병조판서, 대사헌, 도승지를 거쳐 우의정이 되고 영중추부사,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그는 배청 친명파로써 두번이나 청나라에 억류된 적이 있다.
가족관계
조부 : 이극강(李克綱, 1534 ~ ?)
조모 : 온양 정씨 - 정숙(鄭琡)의 딸
부친 : 이수록(李綏祿, 1564 ~ 1620)
모친 : 진천 송씨 - 선부관(宣傳官) 증 참의(贈 參議) 송제신(宋濟臣)의 딸
남동생 : 이정여(李正輿, 1591 ~ ?)
여동생 : 청주 한씨 한무(韓楙)의 처(1603 ~ ?)
정부인 : 해평 윤씨 - 영의정(領議政) 윤승훈(尹承勳)의 장녀
자녀 없음
계부인 : 풍천 임씨 - 별좌(別坐) 임경신(任景莘)의 딸
장남 : 이민장(李敏章, 1620 ~ 1694)
며느리 : 함평 이씨 - 도정(都正) 이초로(李楚老)의 딸
손자 : 이정명(李鼎命, 1642 ~ 1700)
손자 : 이진명(李晉命, 1647 ~ ?)
손자 : 이태명(李泰命, 1650 ~ ?)
손녀 : 은진 송씨 송주석(宋疇錫)의 처(1653 ~ ?)
손녀 : 평산 신씨 신계화(申啓華)의 처(1654 ~ ?)
손녀 : 광산 김씨 김진규(金鎭圭)의 처(1657 ~ ?)
차남 : 이민적(李敏迪, 1625 ~ 1673) - 남동생 이정여(李正輿)의 양자로 출계
장녀 : 전주 이씨(1631 ~ ?)
사위 : 연안 이씨 현감(縣監) 이준(李懏)
3남 : 이민서(李敏敍, 1633 ~ 1688) - 사촌 남동생 이후여(李厚輿)의 양자로 출계
4남 : 이민채(李敏采, 1635 ~ ?)
며느리 : 고령 박씨 - 판서(判書) 박장원(朴長遠)의 딸
손자 : 이이명(李頥命, 1657 ~ ?) - 차남 이민적(李敏迪)의 아들
차녀 : 전주 이씨(1639 ~ ?)
사위 : 반남 박씨 박세격(朴世格)
이경여의 집안은 조선의 4대 명문가로 불린다. 학식과 덕망의 상징인 대제학을 3대 연속으로 배출했기 때문이다. 조선조에 한 가문에서 3대 연속으로 대제학을 배출한 곳은 전주 이씨 백강 이경여 가문, 광산 김씨 사계 김장생 가문, 연안 이씨 월사 이정귀 가문, 대구 서씨 약봉 서성 가문 등 네 집안이다. 이들 집안은 대제학 중에서도 일부에게만 주어지는 문형(文衡)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문형은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이끌고 균형을 잡는다는 뜻이다. 문형이라는 칭호는 홍문관 및 예문관 대제학에 성균관의 대사성이나 지성균관사 등 나라 전체의 학문 관련한 세 가지 직위를 모두 겸해야 가능했다. 품계는 판서와 같은 정이품이었지만 그 가문에서는 삼정승 육판서 모두를 배출한 것보다도 더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임기는 본인이 사임하지 않는 한 종신직이었다. 이경여 가문은 이경여, 아들 이민서, 손자 이관명, 증손자 이휘지가 내리 문형을 지냈다.
그가 부여에 낙향한 것은 45세 때이다. 외가인 윤씨 쪽에서 땅을 얻은 데 따른 것이다.
대재각에 새겨져 있는 ‘至痛在心 日暮途遠’은 이경여 선생이 73세 때 죽기 3개월 전 임금에게 올린 상소에 대해 효종이 내린 답변의 핵심 내용이다. 당시 이경여는 답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대재(大哉)라! 왕언(王言)이여…”라고 했다고 알려진다.
그 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왕의 뜻을 이어 받아 2차로 북벌 계획을 구상할 때(현종 때) ‘至痛在心 日暮途遠’ 여덟 자를 써 자신의 제자이자 이경여 선생의 셋째 아들인 이민서에게 준 것을 이경여 선생의 손자인 이이명이 1702년 할아버지 집 뒤의 자연석에 새긴 것이다. 출처 : e부여신문(http://www.21cbuyeo.co.kr)
그 정점 영의정이었으며 3제학의 문중으로 가장 자랑스럽게 모시는 백강의 묘소는 사진에서 보면 초라하기만 하였다.
직계 후손들이 여의치 않았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형제인 厚與 申與 公與의 묘소와도 대비된다.
이대로 방치하는 것이 괜찮은지 밀성군 전 자손들이 숙고해야 할 문제인것 같다.
효종실록19권, 효종 8년 8월 8일 무인 1번째기사 1657년 (청 순치(順治) 14년)
영중추부사 이경여의 졸기 및 그의 유차(遺箚)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죽었다. 그의 유차(遺箚)에,
"신이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나 티끌만큼의 도움도 드리지 못한 채 지금 미천한 신의 병세가 위독해져 하찮은 목숨이 곧 끊어지게 되어 다시금 상의 모습을 우러러 뵙지 못하고서 밝은 시대를 영원히 결별하게 되었으니 이 점을 땅속으로 들어가면서 구구하게 한하고 있습니다. 오직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기뻐하거나 성내는 것을 경계하고 편견을 끊으시며 착한 사람을 가까이 하고 백성의 힘을 양성하여 원대한 업을 공고하게 다져 죽음을 눈앞에 둔 신하의 소원에 부응해 주소서. 신의 정신이 이미 흩어져 직접 초안을 잡지 못하고 신의 자식에게 구두로 불러 주어 죽은 뒤에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막 원로를 잃고 내 몹시 슬퍼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이어 유소를 받아 보니 경계해 가르침이 더없이 절실하고 내용이 깊고 멀어 간절한 충성과 연연해 하는 정성이 말에 넘쳐 흘렀으므로 더욱 슬퍼서 마음을 진정할 수 없다. 띠에다 써서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경여는 인품이 단아하고 몸가짐이 맑고 간결하였으며 문학에도 뛰어난 데다 정사의 재능도 있어서 사림들에게 존중받았다. 젊은 시절부터 벼슬에 나오고 물러가는 것을 구차하게 하지 않았고 혼조(昏朝) 에 있으면서도 정도를 지켜 굽히지 않았다. 계해 반정(癸亥反正) 에 맨 먼저 옥당에 뽑혀 들어가 화평하고 조용하게 간하니 사랑과 대우가 특별히 높았다. 고 정승 장유(張維)가 일찍이 한 시대의 인물을 평론하면서 말하기를 "이경여는 경악(經幄)에 있을 때에는 마음을 쏟아 임금을 인도하는 책임을 다했고 지방에 있을 때에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펴는 임무를 다했으니 지금에 있어서 재능을 두루 갖춘 자이다"고 하였다. 병자년 이후로 벼슬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인조가 그를 소중하게 여기고 신임하였으므로 발탁해 우상에 제수하였다. 그런데 이계(李烓)가, 경여가 명나라에 뜻을 두고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는다고 청나라 사람에게 고하여 두 번이나 심양에 잡혀갔었으나 몸과 마음가짐이 더욱 굳건하였다. 을유년 세자를 세울 때 자기의 소견을 변동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서 남북으로 귀양살이를 다녔으나 상(효종)이 즉위하자 방면하고 수상에 제수하였다. 이 때 선비들의 의논이 매우 격렬하였으나 경여가 화평한 의논으로 견지하면서 이들을 조화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는데 혹 이를 그의 단점으로 여기기도 했다. 얼마 안되어 청나라에서 경여가 정승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힐책하자 이 때부터 정승의 자리에서 물러나 묻혀 살았다. 그러나 나라에 일이 있을 때마다 말씀을 올려 건의한 바가 많았었다. 이 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73세이다.
출처 조선왕조실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