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신빈 김씨(愼嬪 金氏)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장호 댓글 0건 조회 55회 작성일 25-11-08 10:05

본문

신빈 김씨(愼嬪 金氏) 

조선 세종의 후궁. 아버지는 김원(金元)이며, 어머니는 삭녕 고씨이다. 본래 내자시(內資寺)의 

공노비였는데, 나이 13세에 원경왕후의 눈에 띄어 소헌왕후를 모시는 궁녀가 되었다가 

세종의 후궁이 되었다. 

슬하에 계양군 이증, 의창군 이공, 밀성군 이침, 익현군 이연, 영해군 이당, 담양군 이거

그리고 두 옹주를 낳아 62녀를 두어 세종의 여러 후궁 중 압도적인 다산을 자랑했기 때문에 

현재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의 화성시청 인근에 조성된 그녀의 묘역은 깔끔하게 단장되어 관리되고 있다. 

1427(세종 9)에 계양군을 낳았다. 이때 '궁인 김씨'가 낳았다고 썼으나 1439(세종 21) 

담양군을 낳았을 때는 '소의 김씨'라고 썼으므로 여러 아들들을 낳는 동안에 후궁으로 봉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막내 아들 담양군을 낳은 그 해에 종1품 귀인으로 품계가 올랐고 이어서 신빈(愼嬪)으로 봉작되었다. 


"소의(昭儀)는 본래 내자시(內資寺) 여종[]이었으나, 무술년에 내가 처음으로 즉위하였을 때에 모후(母后)께서 뽑아 중궁으로 보내었고, 그때의 나이는 13세였었다. 천성이 부드럽고 아름다워 양궁(兩宮)을 섬기는 데 오직 근신함으로, 중궁이 매사를 위임하고 막내아들을 기르게 하였으니, 성품이 근신하지 않았다면 중궁이 하필 소생 아들을 기르게 하였겠느냐."세종실록세종 21127 

신빈 김씨는 타고난 성품이 부드럽고 근신하여 윗사람을 잘 모셨던 데다가, 소헌왕후의 신임을 받아 

소헌왕후 소생의 수양대군을 돌보았고, 어린 영응대군의 유모 역할도 맡았다. 

덕분에 훗날 세조와의 인연으로 자식들이 계유정난의 공신이 되어 살 수 있었고, 자손이 더욱 번창할 수 있었다. 

같은 후궁 이었던 혜빈 양씨가 단종을 지지해서 아들들과 친정이 다같이 몰살당한 것과 비교된다. 

사실 1437(세종 19) 장남 계양군이 한확의 딸과 혼인하면서 세조와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된 영향도 있다.

한확의 누이는 명나라의 공녀로 가게되어 영낙제의 후궁이 되었다. 한확은 영낙제로 부터 벼슬을 받았다. 그러다가 영락제 흉서후 누이가 순장되었다. 한확은 다시 누이 동생을 공녀로 보냈다. 조선 초기 조선과 명나라를 오가면서 세도가 가장 드높았으며, 둘째 딸은 계양군의 정실부인, 막내 딸은 훗날의 인수대비가 되었으므로 혜빈 양씨와 비교할 때 신빈 김씨의 승리는 예정된 일이었다. 공녀로 바쳐진 누나가 바로 명나라 제3대 황제였던 성조 영락제 주체의 후궁 강혜장숙여비 한씨였다. 미색도 뛰어났지만 영락제의 비위를 잘 맞췄던 그녀는 총애를 받아 곧 비()로 책봉되었고, 그 총애는 동생인 한확에까지 미쳤다. 이 때부터 한확의 입지는 그야말로 언터쳐블이 되는데, 역시 공녀로 뽑혀 명나라로 가던 황씨가 이미 외간 남자와 사통해 임신하고 있었음이 밝혀져 조선 사신단의 목숨은 물론 조명 관계마저 위태로워질 지경이었으나 한씨 남매가 대노한 영락제를 달래어 겨우 넘어갈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한확은 작게는 단신으로 황씨 일가와 진헌색 관리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었고, 크게는 조선의 대명 외교 참사를 수습한 것이었다. 

영락제는 한술 더 떠 한확을 아예 정5품 봉의대부 광록시 소경에 봉했고, 그의 잘생긴 외모에도 호감을 가져 심지어 부마로 삼으려고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은 그의 외모를 가리켜, '미풍의(美風儀), 준정(峻整)'이라고 표현하였는데 번역하자면 잘생긴 외모와 훤칠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당대의 미남 이었던듯 하다. 세조시 좌의정으로 중국 사신으로 가 계유정난을 명 조정에 무마하여 세조로 부터 공로를 인정 받았다. 이런 사실은 신빈 소생들이 세조로 부터 화를 면하는 데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고려말 원 기황후의 후광으로 동생 기철이 고려 조정에서 권신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과 비교할만하나 기철처럼 그렇게 심하지는 않있던 것 같다. 후일 공민왕은 원 세력 숙청을 위해 기철 일당을 궁중 연회에 초청 철퇴로 죽였다. 

당대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신빈 김씨도 불교에 대한 믿음이 깊었다. 특히, 아예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살았는데, 세종의 상중에 막내 아들 담양군이 12세의 나이로 요절하는 바람에 충격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신빈 김씨가 요절한 아들을 위하여 불경을 인쇄하려고 하자, 문종은 쌀 500석과 함께 필요한 물건을 내주어 국고를 비웠다는 비판을 들었다.

오죽하면 신빈 김씨의 차남 의창군이 어머니가 머리를 기르게 해달라고 청하자(還俗),

단종이 의정부와 논의하여 還俗하라고 명했으나 신빈 김씨는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김수온이 쓴 묘적사중창기(妙寂寺重創記)에 따르면, 밀성군이 어머니를 오래 모시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현 경기도 남양주시에 자리한 '묘적사'에 후하게 시주하고 신빈 김씨의 원찰로 삼았다고 한다. 

신빈 김씨는 말년에 건강이 좋지 않아서 자주 온천으로 목욕을 갔다. 신빈 김씨의 온천행은 단종실록부터 

언급되는데, 한번 온천으로 갈 때마다 아들들이 뒤를 따랐으므로 많은 물자가 소비되어 비판 받았다.

그러나 세조는 관찰사에 명하여 신빈 김씨를 대접하는 데에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후 그녀는 1464(세조 10) 94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세조는 쌀, 콩등 모두 70()을 부의로 내렸다. 그녀의 묘 화성 남양리 신빈김씨 묘역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에 있다. 묘 주위에는 세조 11(1465)에 세운 묘갈(墓碣:무덤 앞에 별다른 장식없이 세우는 작은 비석)과 묘비, 불을 밝히기 위한 장명등(長明燈), 문인석 1, 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올리기 위한 상석(床石)이 있으며 묘 주위는 돌담으로 둘러 싸여 있다. 1994년 경기도의 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영조의  모친  숙빈 최씨가 무수리였다는 설도 있으나 영조는 침구실 궁녀였다고  한점에 비해 노비에서 빈까지 된 신빈은 조선의 신데렐라였다. 궁녀가 빈이 된 예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