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의 유래와 역사(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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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3회 작성일 22-11-11 22:49본문
우리 조상들이 처음으로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고려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는 불교국가라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없었지만 공양왕 무렵 성리학을 바탕으로한 사대부들이
형성되면서 제사의 풍습이 시작되었다.
그때 부터 시작된 조상에 대한 제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제사는 의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권리의 성격을 가진 특수한 문화였다.
즉,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의 사대부들은 제사를 권장하면서도 동시에
직급이나 신분에 따라 제한을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통상 4대봉사라 하여, 부모, 조부모,증조부모, 고조부모, 까지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이는 조선후기에 와서야 가능했고, 임진왜란 이전 까지는 신분이나 벼슬에 따라 차등을 주었다.
6품이상의 관헌은 3대 , 7~9품의 관헌은 2대, 일반 평민은 부모의 제사만 지낼 수 있도록 했고,
이를 경국대전에 수록하여 놓았다.
그러나 실제 조선전기까지는 제사를 지내는 평민들은 많지 않았고, 사대부들도 제사에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관직을 배출한 양반가는 3대 봉사를 할 수 있었지만, 1년에 추석, 설 명절을 포함하면 8차레나 제사를 준비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조선 중기까지는 아들이나 딸 구분없이 번갈아 가며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유산의 상속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그러니까 조선중기 까지는 유산상속이 딸,아들 구별없이 비교적
균등하게 이루어졌다.그래서 제사에 대한 부담도 나누어 가지게 된것이었다
그럼 언제 부터 장남이 제사를 독점적으로 부담하게 되었을까
왕실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종묘가 있고, 민간에서 는 사당이 있다.
조정에서는 사당을 장려해서 왠만한 양반가에서는 사당 을 건립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당은 장남이나
장손이 살고 있는 집 근처에 세워졌다.
그런데 조선초부터 200여년 간은 자식들이 번갈아 가면서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사당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고, 이때에는 지방에 신위를 모시고 지냈다.
이러한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건 임진왜란을 겪은 17 세기 부터이다.
임진왜란은 조선사회 전반에 큰 타격을 입힌 전쟁이다.그중에서도 지배계층인 양반층의 권위가 매우 심각
하게 손상되었다.
국가적인 위기상황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못한 사대부 들의 위신은 크게 추락했다.
이에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 일반 백성과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겉치레적인 형식을 강조하기 시작 했다.
그래서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관례화 되기 시작했다.이러한 이유로 인해 사당을 가진 장자에 의한 제사가 일반화 되었고, 동시에 유산의 장자 상속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곧 유산상속의 명분과 권리가 주어 졌다는 말이다.
나아가 부모가 돌아가시면 지위에 따라 상복을 입는 기간도 모두 3년으로 정착되었고 누구나 4대 봉사를
해야 옳은 것으로 바뀌었다.
결국 조선이 성리학이 지배하는, 성리학적인 도덕률이 보편화된 사회로 변모함으로써 양반의 권위는 반석위에
서게 되었다.더구나 양반에게 군역 면제의 특권이 부여되자 양반은 더욱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누구라도 양반이 되고자 했고 이는 조선후기로 갈수록 심해졌다. 돈을 주고 족보를 사서 양반이 되는 사람이 늘어나고 이들 역시 제사를 철처히 지냄으로서 양반의 권위를 갖고자 했다.
이처럼 제사를 지내는 양반이 늘어나자 일반 백성들도 자연스레 추종하게 되었고, 신분제가 페지된 20세기
에 들어와서도 유지된 것이다.
제사를 제대로 지낸다는 것이 곧, 양반이라는 의식이 여전히 남아 오늘날 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제사는 조상에 대한 감사나 영혼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양반의 권위와 유산상속이라는
두가지 목적에 의해 보편화 되었다고할 수 있다.(펌글)